본문 바로가기

브랜드

루이비통 역사 가방

반응형

루이비통 역사


루이비통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명품 브랜드로 2022년 브랜드 디렉토리 기준 세계 명품 패션 브랜드 가치 순위에서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시계, 보석, 의류, 잡화 등 모든 카테고리를 통틀어도 단일 럭셔리 패션 하우스 브랜드 중에서 가장 높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

반응형

수많은 명품 브랜드들이 포진되어 있는 LVMH 그룹의 최상위 브랜드로 포지셔닝되었고, LVMH 그룹 매출의 절반 이상을 혼자 책임지고 있다.

또한 고가 브랜드임에도 전 수석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의 영향으로 발전한 PVC 라인의 모노그램 잡화가 길에서 가장 흔히 보일 정도로 대중성을 띄고 있는데, 특히 아시아에서 모노그램 라인의 수요가 강력하다. 이렇듯 고가 브랜드임에도 자본주의 체제하에 매우 상업주의적 아이콘 격의 이미지를 풍기고 있는 매우 독특한 포지셔닝을 하고 있다.


루이 비통역사
루이 비통은 1821년 프랑스 안쉐(Anchay)라는 작은 마을의 한 목공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14살때 집을 나와 16살이 되던 1837년 파리에 도착해 가방 제작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무슈 마레샬의 견습생으로 일했다.

반응형

루이 비통의 섬세하고 특별한 기술은 곧장 유명해졌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많은 양의 짐을 싸는 데 탁월한 기술을 갖췄던 루이 비통은 프랑스 왕실 황후 외제니 드 몽티조의 전담 패커로 일하기 시작했고 황후의 후원하에 파리 뇌브 데 카퓌신 4번가에 자신의 이름을 건 포장 회사를 개업했다.

 

이는 오늘날 루이 비통의 뿌리가 되는 회사이다. 루이 비통의 트렁크는 평평하게 만들어져 마차에 쌓기 편리한 구조였다. 모양뿐만 아니라 기존의 나무 재질에서 루이 비통만의 목공 기술을 살려 특별 제작한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라는 소재로 만들어져 가볍기도 했다. 당시 트렁크는 현대에서 흔히 만들어지는 사각형이 아니었다. 볼록하게 생겨 차곡차곡 쌓기 힘든 모양새였다.

이러한 혁신적인 트렁크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기존 매장에서 수요를 감당할 수 없자 1859년 파리 근교 아니에르에 공방을 세웠다. 1885년에는 영국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매장을 열면서 첫 해외 지점도 오픈했다.

반응형

루이 비통의 획기적인 기술과 명성은 아들 조르주 비통에게도 이어졌다. 1886년 소매치기들이 가방을 쉽게 열지 못하도록 가방에 자물쇠를 부착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

1867년에는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 참가했다. 루이비통은 모조품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1876년 베이지와 갈색 줄무늬 색으로 디자인을 변경했다.1885년에는 영국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첫 해외 매장을 오픈했으며, 이후 다른 회사들이 루이비통과 똑같은 제품들을 모방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루이비통 상표를 등록해 1888년 "marque L. Vuitton déposée"라는 대표 로고를 만들었고, "다미에 캔버스"를 런칭했다. 

반응형

1892년 회사를 설립했던 루이비통이 죽고 아들 조르주 비통에게 회사 경영권을 넘겼다. 아버지 루이가 죽은 뒤, 조르주는 회사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드는데 힘썼고, 이것의 일환으로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서 회사의 제품을 전시했다.

1896년 조르주 비통의 구상으로 루이비통은 모노그램 캔버스를 런칭해 세계적인 특허로 등록했고, 이후에 모노그램 캔버스는 회사의 상징으로 알려졌다.
1896년 이미테이션 상품의 유통을 방지하기 위해서 세계 최초로 모노그램무늬를 이용했다.

루이비통의 이니셜인 L과 V, 꽃과 별의 조합의 모양은 그의 아들인 죠르즈 뷔통이 고안했다. 왕후귀족을 시작으로 상류사회의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던 중, 1998-1999 A/W부터 모드에 진입했다. 그때까지 콜렉션 용의 의류를 넣어 나르는 물건을 만들던 브랜드가 의류제작을 시작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디자이너로 기세가 좋은 마크 제이콥스를 받아 들여 첫 콜렉션부터 대호평을 받아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창업주 루이 비통이 죽고 경영권을 이어받은 조르주 비통은 회사를 더욱더 성장시켰다. 1914년에는 샹젤리제 거리에 세계에서 가장 큰 여행 제품 매장인 7층짜리 매장을 세웠다.


1936년부터 1970년까지는 3대 가스톤-루이 비통이 이어받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프랑스 전역에 다수의 매장들을 열기 시작하였으며 상품 라인들도 넓히기 시작한다.

1966년, "빠삐용" 백을 론칭했다.
1970년부터는 4대 마이클 비통이 가업을 이어받는데, 이때부터 유럽을 넘어 본격적으로 아시아와 신대륙에서 인기를 끌며 세계화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1977년, 연 매출이 7 천만 프랑 ($1427 만 US$).1년 뒤, 일본에서 첫 매장을 도쿄와 오사카에 개점했다.
1983년에는 타이완의 타이베이에, 1984년에는 한국의 서울로 매장을 확장했다.
다음년도인 1985년에는 에삐(Epi) 라인이 소개되었다.
1987년에는 LVMH 그룹이 탄생했다. 샴페인과 꼬냑 전문 제조업체 모엣 샹동과 헤네시와 루이비통 과의 합병으로 다음 해인 1988년의 이익은 1987년보다 49%이상 증가했다.
1989년에 다다라, 루이비통은 전 세계에 130개의 매장을 갖게 되었다.
1993년에는 타이가 가죽 라인이 탄생했다.
1996년 모노그램 캔버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전 세계 7개 도시에서 열렸다.
1997년, 루이비통은 마크 제이콥스를 아트 디렉터로 임명했다.다음해에 그는 루이비통의 첫 "프레타포르테" 라인을 선보였다.

반응형
교차형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