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프로필
이종찬은 육군 소령 출신의 정치인으로 제11·12·13·14대 국회의원, 초대 국가정보원장을 지냈으며 현재 광복회장 입니다.
그는 1936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으며 2023년 기준 연 나이 86세 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이규학이며 어머니는 흥선대원군의 외손녀 조계진 입니다.할아버지는 우당 이회영이고 종조부는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입니다. 국회의원 이종걸과는 사촌 형제 간 입니다.
아버지 이규학은 상해에서 일본 헌병대에 연행되어 고문 끝에 청각을 잃게되었으며 이종찬은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1945년 11월 3일 임시정부 요인 환국 때 제1진의 한 사람으로 종조부 이시영, 임정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등과 함께 귀국했는데 귀국 당시 김구를 비롯한 독립투사들과 나란히 사진을 찍은 소년이 당시 10세였던 이종찬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갔다가 1946년에 다시 귀국했습니다.상하이 협진 소학교 3학년을 다니다가 귀국한 그는 1년을 쉬고 동대문에 있는 창신 국민학교 3학년에 편입, 여기서 훗날 부인이 되는 윤장순을 만나게 됩니다.
이후 경기중학교,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60년 2월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16기로 학사 학위 취득하고 군인으로 복무했습니다. 그는 군부 내에서 하나회에 가입하지 않은 몇 안되는 군인이기도 했습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하다 1971년, 소령으로 예편하였고 민간인 신분으로 계속 중정에서 근무했습니다. 중앙정보부에 있을 때에는 정권을 보위하는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도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끌려온 이들을 나름대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김지하와 가까운 사이여서 '오적 필화 사건'으로 정권의 어그로를 잔뜩 끌었던 김지하가 1972년에 '비어 필화 사건'을 일으켜 중정의 분위기가 심히 험악해지자 김지하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연락을 했습니다. 또한 중정 수사관들로부터 조영래의 인품을 전해 들은 뒤,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조영래에 대한 수배가 풀리자 “인재를 살려야 한다”며 법원행정처장을 직접 찾아가 조영래를 사법연수원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이후 주영국대사관 참사관, 1980년 중앙정보부 기획조정실장,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을 역임했고,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했습니다.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12~14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4선 국회의원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민정당)의 간부였지만, 노태우 정권 말기에 다시 여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자를 놓고 김영삼과 경쟁하여 패배한 뒤 당을 빠져나와 새한국당을 창당했고 새한국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였으나 지지율이 정체되자 선거 직전 정주영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사퇴했습니다.
1995년, 새한국당이 민주당에 흡수합당되면서 민주당 소속이 되었고 김대중 진영에 합류했습니다.한때 민주정의당과 민주자유당의 유력 차기 대선주자로 여겨졌지만, 김영삼의 군출신 인사 견제, 숙청으로 그와 갈등하다가 김대중과 손을 잡게 된것.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였던 종로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이명박 후보에게 패하여 낙선했습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1998년 안기부장이 되었습니다. 이종찬은 군 엘리트 출신으로 안기부에 근무한 경력도 있기 때문에 "안기부 개혁은 안기부를 잘 알고 있는 인물에게"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주선으로 안기부 수장으로 발탁되었습니다.이후 국가정보원으로 개편되자 초대 국정원장으로 임명됐습니다.
한때, 김대중 대통령 당시 차기 주자로서 각광을 받던 때도 있었으나, 국가정보원 언론문건 파문 당시 거짓말을 한 것이 까발려져서 국가정보원장 자리에서 경질되었습니다.
국가정보원장을 물러난 뒤 1999년 5월 민주당 부총재로 복귀했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이 되고, 인터넷멀티문화협회 명예회장,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고문에 위촉되었다. 그 해 미국 하버드 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에 선임되었습니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공천으로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으며 2005년 2월부터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았고, 한국선진화포럼 이사로도 선임되었습니다.
제19대 대선때는 문재인 후보의 선대위에 고문으로 위촉되어 합류했습니다.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이 방중하여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였을 때 다른 독립운동가 후손과 함께 동행했습니다.
2021년 재보궐선거 때 타 전직 국회의원 115명과 함께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직 국정원장 자격으로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는 시국선언에 참여했으며 2023년 5월 25일, 제23대 광복회장에 당선되었습니다
2023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사에서 “광복의 과정에서 흥망은 있어도 민족의 역사는 끊기지 않았다”며 “정부는 일시 없어도 나라는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앞서 기념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독립운동을 건국운동이라고 규정한 것과 반대되는말로 보수층과 여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주장을 비판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는 1910년 일본의 조선 강제병합으로 국가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왕정에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상징되는 민주공화정으로 체제를 전환해 존속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회장은 건국절 주장이 일제 강점기를 정당화한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그는 건국절을 인정하게 되면 독도는 우리 땅이 아니며 위안부 할머니와 강제징용 문제는 일본 신민 간의 문제이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의 역사 인식에 문제를 제기한 이종찬 회장은 정부가 추진 중인 이승만 전 대통령 기념관 설립에 대해서도 '괴물 기념관'이 될 수 있다며 비판했습니다.
그는 현재 종로구의 자택 1층에 할아버지인 이회영을 기리는 우당기념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장학사업과 대학생들의 사회활동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기도 한데, 최근 벌어지는 이른바 '역사전쟁'을 의식한 듯, "김구, 이승만이 화해하고, 좌우가 구분되지 않는 기념관을 건립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박병곤 판사 프로필 고향 학력 나이
박병곤 판사 프로필 박병곤 판사는 1985년 수원시에서 태어났으며 2023년 기준 연 나이 38세 입니다. 학력은 수원 효원초등학교, 매원중학교,영덕고등학교를 거쳐 한양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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